시인과 모터사이클, 탈출구를 바라보다
지리산에 들어온 지 10년, 돌아보면 삼십대 중반 당시의 혈기가 아찔하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거침이 없는 무애의 날들이었다. 욕을 먹고 돌을 맞더라도 문득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신이 쏠리는 대로’ 살아보고자 했으니 일단 내 생애 단 한 번의 원은 이룬 셈이다. 참매를 키우던 어린 시절의 고향을 떠난 뒤 절과 대학과 광산, 그 어느 곳에서도 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서울살이 또한 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와 언론사 등 현장을 전전하며 간신히 딱 10년을 견뎠으나 그마저 지리산행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결행한 세상과의 단절 혹은 무책임은 뒷골이 서늘한 해방감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해방이되 참회의 내용과 형식마저 외면하고 그저 산짐승처럼 살고픈 생존본능의 오감과 더불어 그동안 거세되었던 육감을 되살려보려는 ‘지리산 고아’로서의 처절한 해방감이었다. 내리 3년 폐가를 전전하며 상처 입은 산짐승처럼 스스로 치유하며 살다보니 어느새 업보인 ‘제1의 화살’은 등에 박힌 채로 서서히 삭아 그대로 한 몸이 되었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 휘휘 둘러보니 피할 수 없는 ‘제2의 화살’이 날아오는데 이를 또 어찌할 것인가. 지리산에서 생의 한 철 잘 놀았으니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환경운동을 하는 지리산 지킴이가 되고, 토벌대와 빨치산 형제를 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정화수를 올리듯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수경 스님과 도법 스님과의 인연으로 지리산과 낙동강 도보순례와 새만금 삼보일배, 북한산과 천성산과 가야산, 평택 대추리와 생명평화 탁발순례 등 세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함께 했다. 내게 있어 문학은 언제나 이전이 아니라 이후였다. 시는 눈앞에 있는 게 아니라 돌아보면 한참 뒤에서 발자국 위에 미아처럼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내 삶의 전위부대는 시가 아니라 물집 잡히는 발바닥 아니면 모터사이클이었다. 지리산에 와서 뭔가 한 게 있다면 그것은 단지 많이 걷고 많이 달리는 것이었다. 한반도 남쪽 곳곳을 줄잡아 1만5천 리 걸으며 세상사 안부를 묻고, 또한 모터사이클을 타고 50만km 이상을 달리며 두두물물들에게 눈인사라도 했으니 거리상으로 지구 10 바퀴 이상을 돈 셈이다. 마침내 국도와 지방도 어디든 안 가본 곳이 없는 ‘인간 내비게이션’ 수준이 되었다. 내게 있어 20여년이 넘는 시력과 유일하게 견줄 만한 게 있다면 모터사이클 라이딩 경력이다. 아니 어찌 보면 나의 시력은 라이딩 경력보다 한 수 아래인지도 모른다. 스무 살 무렵 어머님의 땔감나무나 도탄(광산 폐석더미에서 훔쳐오는 석탄)을 실어주기 위해 시작한 험한 산길의 라이딩은 그 이후 나의 광부 시절과 방위병 시절을 지나 지금에까지 이어졌으니 ‘아버지의 부재 같은 시’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며 구체적이었다. 여담이지만, 오토바이는 일본식 영어다. 대개는 모터사이클 혹은 약칭 바이크라고 하는데 우리의 법적인 용어로는 이륜자동차다. 그것도 50cc 미만은 번호판이 없는 원동기장치자전거이며, 125cc 이하는 일반 운전면허증이나 원동기 면허증만 있으면 탈 수 있으며, 그 이상의 모터사이클은 면허 취득이 가장 어려운 2종소형 면허(응시자의 5% 정도만 합격)를 따야 탈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모터사이클에 대해 풀 대신 휘발유를 먹으며 초원을 달리는 ‘현대식 말’이라 생각하는데, 동양학의 젊은 대가 조용헌 선생이 “말보다는 지수화풍의 풍, 풍류의 풍자를 따 ‘풍차’라 부르는 게 어떠냐”고 하니 그 또한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나는 그저 죽을 때까지 풍차와 함께 할 생각인데, 사실 ‘시인과 오토바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위험하지 않느냐. 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비웃음을 많이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뭔가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게 겨우 시 쓰기와 라이딩뿐이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누가 뭐래도 나는 시를 쓰며 모터사이클을 타고, 모터사이클을 타며 시를 쓰는 일이 찹쌀궁합이라 믿을 뿐이다. 날마다 이곳저곳 걷거나 혹은 달리면서 속도와 반속도의 경계를 넘나들고,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의 정면으로 달리거나 혹은 측면의 바람에 온몸을 기대는 일이 어찌 시를 쓰는 일과 다르겠는가. 세상사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으니 삶의 급격한 경사를 만나면 내 몸과 마음도 그만큼의 긴장을 팽팽히 유지하고, 코너를 만나면 또 그만큼의 기울기로 유연하게 내 몸을 던져야만 비로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나갈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절절한 시창작의 태도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할 뿐이다.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시창작의 태도, 그 과정을 중시하는 나로서는 바이크 타는 일과 시를 쓰며 사는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산중 외딴집에서 웅크려 있다가 문득 집을 나서면 시속 200km의 아찔한 질주 속에서 언뜻언뜻 마주치는 죽음의 선명한 얼굴과,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시속 700m로 마치 자벌레처럼 기어가는 ‘새만금 삼보일배’ 참회의 얼굴이 얼마나 다르고 또 같은지 날마다 온몸으로 체득하고 또 체득할 뿐이다. 다만 이렇게 시를 쓰고 바이크를 타며 산다는 것은 굳이 ‘자발적 가난’이라는 사치스러운 말을 쓰지 않더라도 매우 궁핍한 것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불구의 세상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자 자본주의적인 무한 경쟁 시대의 낙오자 혹은 방외인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할 미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타는 모터사이클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최고급의 은빛 BMW K1200 LT라는 녀석이다. 25년간 11번 정도 업그레이드하며 타다보니 어느새 모터사이클만은 세계 최고가 된 것이다. 2000만 원을 호가하는 이 첨단의 바이크가 나의 전 재산이니 빈집을 전전하는 시인으로서 참으로 불균형이 극에 달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진짜 꼴불견은 경제적 관점의 사유재산 같은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가 아직 초창기 시절의 낡은 모터사이클의 성능이나 효용성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다. 어차어피 지리산 입산 시절부터 내 집을 꿈꾸지 않는 대신 모터사이클을 선택했으니, 산중의 빈집이 모두 나의 것이긴 하되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동안 모터사이클이 진정한 나의 집이었다.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나는 모터사이클을 모시고 다니는 한 마리 달팽이요, 바이크가 멈추는 바로 그곳이 곧바로 텐트를 칠 수 있는 나의 잠자리였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며칠간 칩거를 하다 지리산 문수골의 외딴집 피아산방을 나선다. 이 세상 가지 못할 곳이 없으니 우선 모터사이클을 타고 861번 지방도를 타고 지리산을 넘어야 한다. 지리산의 댐과 골프장과 케이블카 건설 백지화 문제가 아직 완전 해결되지 않았으니 지리산생명연대의 후배 활동가들과 회의를 해야 하고, 생명평화결사의 전국 종교인 한마당 행사에 시를 낭송해야 하고,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 아이들과 순천대 문창과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러 달려가야 한다. 섬진강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돌아서서 모터사이클 키를 꽂으며 내 심장의 펌프질과 피의 기울기를 RPM 7000, 5단 고속으로 조절한다. 4차선 국도를 시속 200km 가까이 질주하며 잠시 생사를 넘나드는 워밍업을 하고는 곧바로 산길로 접어든다. 구절양장 지리산의 S자 커브가 내 생의 이력처럼 줄이어 나타난다. 돌아보면 해발 0m에 가까운 섬진강이 보이지만 옆을 보면 천 길 낭떠러지가 있고, 앞을 보면 순식간에 해발 1200m의 고갯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옆도 보지 말아야 한다. 두려운 나머지 주춤거리며 자꾸 낭떠러지만 바라보면 어느새 그곳으로 떨어질 뿐이다. 집중 또 집중, 고개를 돌려 S자 커브의 탈출구 라인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고 몸이 가고, 마침내 모터사이클마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원심력으로 코너를 돌아 끝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다. 모든 생이 그러하듯이 자꾸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곳으로 가게 돼있다. 나는 그동안 108마력의 슬픔으로 이 세상을 달려왔다. 볼 것 안 볼 것 다 보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내가 걷고 달려온 길 위에 쭈그려 앉은 나의 시들에게 좀 더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악수를 건네는 것이다. 예감컨대 나이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 내게도 참한 벗 하나 생길 것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