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0.12.4
대상 : ubc아침 방송 촬영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조 후기의 학자이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 · 경제 ·
역리 · 지리 · 문학 · 철학 · 의학 · 교육학 · 군사학 · 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넘겼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다산의 경학연구는 강진유배기에 본격화되어 1812년까지 육경(六 經)의 연구를 마치고 1814년까지
2년 동안에는 사서(四書)에 대한 저술을 완성한다. 소 학과 심경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1815년에 비로소 경학에 대한
연구를 일단락하고 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경세학 관련 저술을 시작해 일표이서(一表二書)라는 불후의 명저 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다산 은 『육경과 사서로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 이었으니 본과 말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다산의 경학 연구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귀향 후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의 이른바 경기학인들과 교유하면서 연구를 계속하여 세상을 뜨기 2년 전인 1834년
이전의 상서에 대한 연구를 수정 · 보완한 <상서고훈>을 완성 한다
10세부터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가 잠시 벼슬을 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
고문(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고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다산은 스스로도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다”고 회고 하였으며 그가 7세 때 지은 “산” 이라는 시가 이를
입증하여 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또 다산이 10세 이전에 지은 시문을 모은 「삼미자집(三眉子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1777년 다산은 자신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 나게 되었으니 그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이다. 다산이
두 살 되던 해에 성호가 세상을 떠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산은 성호의 글을 접하고 학문을 굳히게
되었다.다산은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 (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것은 지방수재에
불과한 그에게 세상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계기 가 되었다
다산은 23세 때 (1783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의 시험을 통해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으며, 첫 벼슬인 희릉직장 을 비롯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많은 경비 를 절약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였으며, 연천 현감
김향직과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였 다. 이를 통해 관리의 책임과 의무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23세때 甲辰年(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斗尾峽) 의 배 위에서 다산과 사돈 관계에 있던
광암(曠菴) 이벽(李檗, 1754~1786)으로 부터 처음 천주교를 접하였다. 이후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 곧 손을 떼었다. 다산은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나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