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10.6.13
대 상 : 법정 스님 인도기행문 중에서
간디 : 1869.10.2~1948.1.30
런던대학교를 졸업하신 분
경력 : 1942년 대규모 반불종 운동 인도를 독립시킨 독립운동가
간디의 자선전을 읽고 난후
마하트마간디는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비폭력운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세 때 런던에서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의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백인에게 박해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1915년 귀국할 때까지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아힘사(불살생), 무소유, 무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바탕 위에 사티아그라하(진리의 주장)
운동, 아슈람 공동체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 ·
취업 거부 · 상품 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지도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그가 보인 평화정신은 세계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는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융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8년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흉탄에 쓰러지게 되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 불려온 그...마하트마간디는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 비폭력운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 18세 때 런던에서 법률을 배우고,
1891년 귀국하여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893년의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백인에게 박해받는
인도인들을 보고 1915년 귀국할 때까지 인도인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위해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아힘사(불살생), 무소유, 무집착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적 바탕 위에 사티아그라하
(진리의 주장) 운동, 아슈람 공동체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영국에 대한 비협력 운동의 일환으로
납세 거부 · 취업 거부 · 상품 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지도했다. 인도 카스트의 최하층인
하리잔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도 노력하였으며 그가 보인 평화정신은 세계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는 1947년 7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융화를 위해 활동하던
중 1948년 1월 30일, 반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흉탄에 쓰러지게 되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R.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은 뒤로 '마하트마
간디'라 불려온 그는 인도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혼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정신이 기려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인도의 자치(自治)』가 있다.
<초기>
간디는 인도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하지코트
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인격자였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종교인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
로 정직한 성격과 성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결혼>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부모의 뜻에 따라 카스토르바이와 결혼했다. 한때 간디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청년기에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도가 싸움을 벌였을 때, 한 힌두교 지도자가 '힌두교인이
한 명이라도 죽으면 우리는 그 몇 배의 보복으로 이슬람교도를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간디는
이 명령에 지지를 보냈다
간디는 아내와 잠자리를 가지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 때문에 그는 금욕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 뒤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을 자제하기도
했다. 그는 정액은 생명력의 근원이고 정액의 배출은몸과 머리를 약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뒤로 일생 동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고 그들을 가까이 두었음에도 직접적인 성행위나 사정은
자제하였다 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하려고 지원했으나 참전하기 며칠 전결핵 의한 염증에
걸려서 포기해야만 했다.
<영국유학>
1887년 열여덟 살 때 인도 사밀러스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영국유학을
결심하였는데, 당시 힌두교에서는 그의 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청년들이
서방의 자유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힌두교 원로지도자들은 간디를
배웅하면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할 정도로 격렬하게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3년간의 영국유학생 시절 간디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개인적인 도덕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도와는
다른 런던의 도시생활과 음식, 예절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힌두교 전통에 따라 채식을 고집하여,
멀리 떨어진 채식식당까지 가서 밥을 먹을 만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으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는 어린시절 영국처럼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에 감화되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독립운동>
그 뒤 남아프리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귀국 전 이미 별세한 뒤였다.
인도 라지코트와 봅베이에서 변호사생활을 하던 그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디아계 상사에서
근무하기로 하였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교통시설 이용,취업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고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했다.
남아프리카의 프리토리아에서 살던 시절 간디는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894년6월,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됐다.
1894년7월 정치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나탈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인도인 차별법의 입법은 막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나 나탈·영국·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 더반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그는 '나탈 인도국민회의
'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실상을 국제사회의 여론에 널리 알렸다.19155년 이후 1918년까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1919년 반영운동을 하면 체포영장 발부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 반영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1919년 봄 그는 사티하그라하 투쟁을 선언하고 봉기가 발생했지만 400명의 인도인이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학살당하면서 운동은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
1947년8월15일 인도는 드디어 영국에게서 독립을 했으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분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종교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모습으로 보였으며,
결국 1948년 1월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같은 힌두교 신자 나투랍고드세에게 총을
맞아 암살 당했다.
1930년 그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입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간디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에 4번이나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의 물망에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
평가와 비판
<평가>
그는 일생 동안 신약성서의 영향으로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국민회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또 그 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런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다. 1999년4월1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욕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다.
<비판>
사회운동의 모순
간디는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자본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에 불과했다.
그는 1917년 파업권 없는 노조 결성 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해서 구자라트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는데,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권리를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 가족임금제도(가족 중 한 명이 실직시 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하는 제도)를 받아들여, 힘없는 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였다.
제1차대전 협력하면 인도를 독립시켜주겠다는 영국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인도의 전쟁가담을 주도했는데,
이는 폭력 이외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모순된 도덕성
*성윤리의 모순
또한 1990년대 이후 간디의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간디 스스로도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어려움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환갑이
넘어도 끊이지 않는 몽정을 속죄하기 위해 발가벗은 수 명의 아가씨들과 함께 자는 의식을 하기도 했다가
세찬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밤만 되면 오한으로 시달렸던 그는 자신과 친숙하게 지내던 집안의 일부 처녀나 새색시들에게 체온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알몸으로 간디의 몸을 데워 주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심과 간디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침대에 들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린 소녀들과 동침한 일에 대해 평소 오한 증세도 있었지만, 실상은 서양의 회춘법인 스네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증손녀뻘 되는 친족인 마누간디와도 동침하였는데, 작가 월리엄\
샤일는 이를 두고 '여성의 질투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바람둥이'라고 비판하였다.
*지나치게 엄한 아버지
그의 아들 할리랄간디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도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며 '작은 간디' 라는 이름을 얻으리만큼
노력하였으나,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던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이름람교로 개종한다
아버지의 위대한 삶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구이언
그의 아내가 폐에 염증이 생겨 고통을 받았다. 이때 영국인 의사는 항생제를 주사하면 치유가 가능하다고
설득했지만 그는 영국인 의사의 진료를 거절하였다. 아내가 죽고 며칠 뒤 그는 학질을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영국인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장염에 걸렸을 때에는 영국인 의사의 시술을 받기도
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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